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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 | 24/05/24 01:36 | 추천 12 | 조회 75

관동 대학살이란 광기 속에 홀로 선 의인 +75 [3]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618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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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대학살.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극심한 사회 불안이 쌓이고

화재와 오염, 질병 등이 돌자

평소의 반한감정을 힘입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라는 유언지어가 퍼지면서

일본인 자경단들이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


일본의 경찰들은 이를 방관하거나

가끔은 동조하는 등의 행동으로

피해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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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밝게 인사하던 옆집 사람들도

발음이 안 맞는 사람들을 조선인이라고 죽여대던,

비상식적인 일이 일반인들이 행하던 광기의 시대에,

조선인을 보호한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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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와 스네키치 경찰서장.






당시 46세이던 오카와 서장은 쓰루미 경찰서에 조선인을 하나둘 보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부하 경찰관들조차 동요했다. 오카와 서장은 “조선인들은 모두 선량한 사람(良民)”이라며 설득했지만 쉽지 않았다. 동요가 이어지자 오카와 서장은 조선인들을 근처에 있던 절 본당으로 이동시켰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관 30여명을 배치했다. 조선인의 수가 계속 늘자 그는 다시 경찰서로 이들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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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 사흘째인 9월 3일, 1000명이 넘는 무리가 쓰루미 경찰서를 에워쌌다. “경찰서가 조선인 보호소냐, 조선인을 내놓으라”는 위협이 이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오카와 서장은 “조선인에게 손을 대볼테면 대보라. 한 명이라도 넘겨줄 수 없다”고 맞섰다. “한 명이라도 탈출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자경단의 항의에 그는 “만약 한 명이라도 도망치는 사람이 있다면 할복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자경단은 돌아갔고, 그가 이렇게 구한 조선인은 약 300명에 이르렀다.









경찰 기록 외에도 당시 그의 행적을 좇은 기록이 있다. 재일동포 작가 박경남 씨가 오카와 서장의 아들과 목격자들을 취재해 1992년 출간한 책『두둥실 달이 떠오르면』이다. ‘불량한 조선인’을 내놓으라는 자경단의 겁박이 있던 9월3일, 오카와 서장은 “조선인들이 독을 투입한 우물물을 가져와라. 내가 먼저 마시겠다. 이상이 있으면 조선인들을 넘기겠다. 이상이 없다면 이들을 나에게 맡기라”고 일갈했다. 오카와 서장은 왜 조선인을 감싸느냐는 자경단의 힐책에 “어느 나라 사람이든 사람의 생명은 변함이 없다. 인간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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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오카와 서장의 보호로 목숨을 구했던 조선인들이 대지진 5개월 뒤 보낸 감사장이다. 일본어가 아닌 한자와 한글을 섞어 써내려간 편지 말미엔 8명의 조선인 이름이 적혀있었다. 오카와 유타카는 “한글은 잘 모르지만 한자만 봐도 당시 어떤 마음으로 썼을지 느껴진다”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조부가 한 일인데, 제가 인터뷰를 하니 쑥스럽네요. 살아계셨다면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 경찰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하실 겁니다.”








그의 손자는 '당연한 일인데 칭찬받아 쑥쓰럽다'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광기에 시대에 소신을 가지고 홀로 정상인으로 사는 것도

영웅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광란의 시대여도 의인은 한 명씩 있군요.

일본이 쉬쉬하는 일일수록

이런 분은 우리가 더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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