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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이먼드.. | 24/05/21 16:21 | 추천 27

한일합방 이후 고종과 순종의 고달픈 삶 +13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532777772

한일합방 전후 고종과 순종은 어떻게 지냈을까?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다음 매일같이 비분강개 절치부심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몰래 우리 조선의 독립을 위해 독립군들을 도와주고 군자금 대주고 노력을 하며 그렇게 살았을까? 합방 전후 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사료를 통해 소개한다.
 



일본의 합병되기 이전 대한제국의 황실 기구 즉, 고종과 순종의 황실을 유지하기 위해서 '궁내부'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궁내부가 아주 극도로 비대해져 있었다.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보니 대체 이놈의 나라는 어떻게 정부 공무원보다 황제를 위한 관리가 더 많냐고 하며 개혁을 해야 하겠다 해서 궁내부 소속 관원 중 4,400명을 대량 해고한다. 그러나 그렇게 했는데도 1909년에 칙임관이 33명 주임관이 76명 판임관이 229명 그리고 궁녀와 내시가 4,000명이나 바글대고 있었다. 이후 한일합방 이후에 대체 궁녀와 내시가 대체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하냐고 하여 또 인원 감축을 해서 궁녀 내시의 정원을 2,000명으로 감축 방침을 세우고 1920년까지 1,450명을 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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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고종이 1919년 3.1운동 직전에 죽었는데 죽을 때까지 궁녀와 내시가 2,500명이었다는 이야기다. 고종은 이 궁녀와 내시들과 아주 해피하게 즐겼는데, 합방된 이후 고종은 덕수궁에 살게 해서 '덕수궁 이태왕', 순종은 창덕궁에 살게 해서 '창덕궁 이왕' 이렇게 이름을 붙이고 각각 나눠 살게 했는데 고종이 을미사변으로 인해서 왕비인 민비가 일본 사람들에게 시해당한 후에 '엄상궁'이라는 여성과 같이 살다가 엄상궁이 1911년 7월 20일 날 덕수궁에서 죽었다. 엄상궁이 죽은 그 이후부터 고종은 2천여 명의 궁녀들이 모두 자기 것이니까 그때부터 이 궁녀 저 궁녀 데리고 거사를 치러서 이때부터 애를 낳기 시작을 한다.

1912년 '귀인 양씨'라고 되어 있는데, 이 귀인 양씨는 원래 신분이 아주 미천해서 오빠가 짐승을 도살하는 업종에 종사했다고 하니 조선 시대에서 가장 하층민이다. 즉 백정의 집안이었는데, 이 여성이 궁녀가 돼서 덕수궁에 들어와서 '소주방 나인' 이 되었다. '소주방'은 음식을 만드는 부서로 즉, 왕실 주방의 식모였다. 이 식모와 동침을 해서 1912년 덕혜옹주를 낳았다. 이때 고종의 나이가 61세로 덕혜옹주는 고종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랬는지 정신이 박약해서 십 대 때부터 정신병의 일종인 조현병에 걸려서 많은 고생을 한다. 그러다 대마도 도주의 아들과 결혼을 하는데 어떻게 그 상태로 결혼을 했느냐 하면 덕혜옹주가 조선 왕족의 일원으로 돈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정신병에 더 심해져서 1955년 이혼하고 그렇게 되는데, 아무튼 고종은 일본 사람들이 주는 세비를 받아 덕수궁에서 주방 식모 이런 여자들 데려다가 애 만드는데 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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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 한 명뿐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광화당 이씨'라는 여성과 또 동침했는데, 이 여성은 '무수리'다. 궁내의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인 광화당 이씨와 1914년 7월 3일 '이육' 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때가 고종 나이가 63세로 1914년은 한일합방이 되고 4년 후다. 광화당 이씨는 계속 생존하다 해방 후에 죽었다고 동아일보에 기사가 났다. 이육이라는 아들은 2살 때 죽었다. 고종이 너무 많은 나이에 아이들을 낳아서 그런지 건강하게 제대로 자란 아이가 하나도 없다.

 이번엔 또 '삼축당 김씨'라는 여성과 또 스캔들이 났다. 삼축당 김씨라는 여성은 본명이 '김옥기'인데 이 여성은 8살 때 경복궁에 들어온 세수간 나인으로 이 여성도 무수리다. 그런데 고종이 여러 궁녀 중에서 삼축당 김씨를 가장 총애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순종이 즉위 후에 아버지가 가장 총애한 궁녀 삼축당 김씨에게 '삼축당'이라는 당호를 지어서 바치고 금반지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 여성은 고종의 아이는 낳지 못했고, 이 사람도 해방 후 죽었는데 당시 신문에 부고 기사가 있다.
 


 

리고 고종은 또 아이를 낳았는데, '이우'라는 아이다. 이 아이는 ‘보현당 정씨’라는 여성에게서 낳았는데 1915년 8월 20일 고종이 64세 때 낳았다만 1916년 7월 25일 날 내막염으로 죽었다. 그래서 이렇게 한일합방 이후 결국 아들 2명과 딸 1명 이렇게 3명을 낳았는데 딸인 덕혜옹주는 정신병 문제가 있었고 아들 2명은 어린 시절 모두 죽었다. 그리고 어떻게 생활했느냐 음악 감상도 하고 궁녀들하고 시원한 곳에 가서 축음기도 틀며 해피하게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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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창덕궁에 사는 순종 이왕은 어떻게 살았을까?

1913년 8월 29일 자 매일신보에 이런 기사가 났다. "순종 이왕께서 '옥돌장(당구장)에 나가서 공을 치시는데 극히 재미를 붙여 여관들을 함께 하신다. 여름에는 서늘할 때 석조전에서 청량한 바람을 몸에 받으시며 내인들을 데리고 이야기도 시키고 유성기 소리도 즐거워하신다더라. " 다시 이야기하면 궁녀하고 당구 치고 음악 감상하면서 아주 해피하게 잘 살았다는 그런 기록이다.



순종도 우리가 흔히 명성황후라고 이야기하는 '민비'가 낳은 아들이 순종인데, 민비가 낳은 아이들은 기형으로 일찌감치 다 죽었다. 그 중 간신히 순종 하나만 살아남았는데, 순종도 무슨 유전인지 뭔지는 몰라도 어렸을 때부터 아주 병약해서 민비가 순종의 건강을 위해서 정말 지극정성으로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당의 말을 듣고 금강산 일만이천 봉마다 돈 일백 냥씩과 쌀을 한 가마니씩 갖다 놓지를 않나, 또 한강에 용왕을 잘 먹여야 아들이 무병장수한다고 해서 용왕님께 바친다고 한강에다가 매일 쌀 500석씩 밥을 지어서 한강에 갖다 붓는 등, 매일같이 무당 푸닥거리를 해서 나라의 재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그 이야기가 '황현의 매천야록'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그 이유가 모두 순종의 건강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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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 당시만 해도 순종은 심신이 쇠약해서 시종들이 좌우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계단도 자기 스스로 걸어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아주 병약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한일병합 후에 일본 황실에서 보낸 최고 의료진들의 도움을 받아서 건강을 회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격도 쾌활해졌고 취미인 당구를 너무나 즐겼으며, 고급 축음기를 가져다가 음악 감상에 빠져 있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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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총독의 기록에 의하면 순종이 어떻게 건강해졌을까 하는 그 부분에 이렇게 적혀있다. "어려운 국사의 근심으로부터 해방된 때문이다" 즉, 아주 골치 아픈 왕조통치를 전부 일본에다 떠넘기고 일본으로 받는 엄청난 세비 받아서 맘 편히 안락하게 지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로다 가스히로(黑田勝弘)산케이 서울 특파원이 최근에 쓴 책을 보면 "우리 일본이 대한제국에 아무래도 당한 거 같다."라고 적은 이유가 나라를 고종과 순종이 일본에 떠넘겼는데 조선총독부가 근대화시키려고 보니까 나라 꼴이 완전히 폐가나 다름없어서 일본 정부로부터 매년 엄청난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조선은 유지가 안 되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일본 본토 국민이 낸 세금이 조선총독부로 계속 투입이 됐던 기록들이 남아 있다. 바로 이래서 "일본이 속은 것 아니냐" 하는 글이 발표될 정도로 나라 꼴이 엉망진창인 상태였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어려운 국사의 근심으로부터 해방되고 나서 열심히 궁녀들과 즐기고 당구 쳤던거다.



창덕궁에서 기거한 순종 이왕은 일본이 왕공족으로서의 예우뿐만이 아니라 일본 육군 대장으로도 예우했다. 그래서 순종의 사진이 있는데 이 사진이 바로 일본육군 대장의 정복이다. 그래서 어디 행차를 할 때는 항상 일본 육군 대장으로서 굉장히 긍지와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늘 육군 대장 군복을 착용하고 다니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왕으로 명칭이 바뀐 순종은 창덕궁에다가 자기를 예우 해주는 다이쇼 천황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그분을 매일 흠모하면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의 궁중 3대 절인 기원절, 천장절, 사방배 때는 반드시 대례복을 입고 총독관저를 방문해서 천황에게 축사를 바쳤다"라고 기록이 나와 있다
 



그리고 순종의 식사를 보좌하기 위해서 일본 제국 호텔의 초대 요리장을 지낸 요시카와 가네키치라고 하는 유명한 요리사 부자가 조선에 와서 순종에게 매일 같이 프랑스 요리를 해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순종의 서양식 식사를 위해서 필요한 치즈와 우유 이런 식자재를 만들기 위해 일본 궁내성에서 아주 특별 불하받은 최고급 소를 사육해서 공급을 받았다. 이런 기록도 보인다.
 



1917년 11월 10일 날 창덕궁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그래서 이왕 순종이 불이 났으니 피난을 해야 하는데, 순종이 제일 먼저 "우리 다이쇼 천황의 초상화를 챙겨라" 했단다. 왜냐면 자기에게 이렇게 행복한 삶을 유지해 주는게 일본 천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이 난 와중에 궁중 관리들이 다이쇼 천황의 초상화를 꺼내려고 했지만 이미 불길이 번져서 초상화를 꺼내 오지 못했고 결국 초상화는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왕직 직원들을 전부 동원하고 총독부의 경무부 직원을 입회시킨 다음 다이쇼 천황의 초상화가 불탄 그 재를 아주 정성스럽게 쓸어 담아서 "비원의 가장 청정한 땅에 봉납했다"라고 한다. 그리고 화재 이후 복구를 위해 다른 곳에 가서 잠깐 생활하십시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지금 다이쇼 천황이 나에게 창덕궁을 주셔서 내가 여기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천황이 주신 이곳을 버리고 내가 어디 가서 산단 말이냐" 하며 비좁은 낙선재에서 창덕궁을 수리할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고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대한제국과 일본이 서로 총 한 방 안 쏘고 평화롭게 병합이 이루어진 이유는 고종과 순종 같은 황족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전부 귀족작위를 받아 30억, 166억씩 돈을 받고 전부 매수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 저항할 만한 사람들에게 전부 돈을 풀어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조선의 일반 상민들에게는 "너희들은 오늘부터 양반과 똑같은 신분이다"라고 하니 노비 천민 상민들 다 만세를 부르며 일본의 통치를 환영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극히 평화롭게 병합이 이루어진 진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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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현재 우리가 부르는 국권피탈(國權被奪) 또는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하는 1910년 8월 29일 날 순종황제가 내린 조칙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순종황제가 나라의 통치권을 일본에 넘긴 후에 이렇게 조칙을 내렸다.

"너희들 높고 낮은 관리들과 백성들은 나라의 형세와 현재 조건을 깊이 살펴서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자기 직업에 안착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도록 하라. 오늘의 이 조치는 너희들 민중을 잊어서가 아니라 민중을 구원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나의 이 뜻을 모쪼록 이해하기 바란다."

이렇게 대한제국은 일본으로 통치권이 넘어갔다

합방당시 매수 결정 이유와 내용은  https://blog.naver.com/quixcha/22294379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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