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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 | 24/05/21 12:51 | 추천 13 | 조회 10

유교 역사 이야기할 때 제일 열불터지는 부분 -중세 유교는 어땠나요? +10 [8]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6147873

??? : 중세 유교는 신분제를 공고하게 하기 위한 제도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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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일반적인 정의대로라면


보통 중세는 5세기에서 15세기를 의미하고


중국사에서 중세를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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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한나라부터 원나라까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시대의 유교에는 신분제 공고화 그런 거 없었어요.



애초에, 유학을 신분제로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쓰려고 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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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을 만든 주희(113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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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양명학을 만든


왕수인(1472~1529)



이 둘인데


이 둘의 이론이 사회 주류가 되는건 15세기에 와서고


이 둘의 이론이 한국 유학 철학의 중심이 되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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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년 소수서원의 설립 이후부터임


그 이전에도 고려 말부터 성리학은 영향을 줬지만.



저 둘은 왜 유학을 신분제 공고화의 수단으로 사용했는가?라면


"저 둘의 시대는 남송, 명이라는 안정된 시대였거든요"


더 이상 누군가가 칭제하며 반란 일으키는 걸 막기 위해서 공고하게 신분제를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중세 유교는 뭐냐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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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고학입니다.



훈고학의 제일 큰 특징은


"유교 경전"에 씌여있는 것 외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집주(주석)으로 치고

경전에 써 있는 걸 기반으로 판단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기론이나 심즉리, 격물치지 같은 개념은 이 시대에 없어요.

훈고학은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


"누구든 왕이 되든 그 사람이 왕답게 하면 왕이다"라고 주장한 학파입니다.







그래서 중세 유교 이야기할 때 주로 하는 게 원문 인용일 수밖에 없어요.



맹자가 위혜왕의 초청을 받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과인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마음을 다 쏟아 하내에 흉작이 들면 백성들을 하동으로 보내고 곡식을 하내로 보내며 하동이 흉해도 그러합니다. 이웃나라들의 정치를 보면 과인처럼 마음을 쓰는 이가 없는데도 이웃나라의 백성이 줄지 않고 우리나라의 백성이 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맹자가 답하였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비유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격렬한 전투에서 크게 패한 두 병사가 도망을 갔습니다. 한 병사는 백 보를 도망쳤고, 또 한 병사는 오십 보를 도망갔습니다. 오십 보를 도망간 병사가 백 보를 도망간 병사를 향해 비웃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위혜왕이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백보가 아닐 뿐 결국 도망간 것 아닙니까?"
맹자는 주저하지 않고 말하였다.
"그것을 아신다면 왕이시여, 이웃 나라보다 백성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농사의 때를 놓치게 하지 아니하면 곡식을 이루 다 먹을 수 없으며 눈이 촘촘한 그물을 못에 넣지 않게 한다면 물고기와 자라를 이루 다 먹을 수 없으며 크고 작은 도끼를 든 사람들을 때를 맞추어서 산림에 들어가게 하면 재목을 이루다 쓸 수 없을 것이니 곡식과 더불어 고기와 자라를 이루 다 먹을 수 없고 재목을 이루 다 쓸 수 없다면 이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이를 장사지냄에 유감이 없도록 할 것이니 살아있는 이를 봉양하고 죽은 이를 상사함에 근심이 없도록 하는 것이 왕도의 시작입니다.


다섯 이랑 크기의 집에 뽕나무를 심으면 오십 노인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닭과 돼지와 개를 길러 새끼칠 때를 잃지 않는다면 칠십 노인도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며, 백 이랑의 땅을 농사 짓는데 농사철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여러 가구의 집들이 굶주림이 없을 수 있으며, 향교의 교육을 엄격히 실시하여 효도와 공경을 거듭 가르친다면 반백의 노인이 도로에서 짐을 지거나 머리에 이지 않을 것이니 칠십 된 자가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하고서도 왕 노릇 못하는 자 없습니다. 개돼지가 사람의 음식을 먹되 단속할 줄을 모르며 도로 위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어도 나라 창고를 열 줄을 모르고 사람이 죽거든 곧 말하기를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흉년이 그렇게 한 것이다’고 하니 이것은 사람을 찔러 죽이고 말하기를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병기가 그렇게 한 것이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왕이 흉년 탓을 하지 않으면 이 천하의 백성들이 (위나라에) 이를 것입니다.


(중략) 

"왕은 ‘어떻게 나의 나라를 이롭게 할까’ 말하며, 대부는 ‘어떻게 나의 가문을 이롭게 할까’ 물으며, 선비와 서인들은 ‘어떻게 나를 이롭게 할까’ (라 할 것이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을 취하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만 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 승의 가문이며, 천 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 승의 가문 사람입니다."
"만에서 천을 취하고, 천에서 백을 취하는 것이 많지 않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의로움을 뒤로 하고 이익을 앞으로 하면, 빼앗지 않으면 만족해 하지 않습니다."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버리는 자가 없으며, 의로우면서 그 주군을 뒤로 하는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또한 인과 의만을 말씀하실 뿐이온대,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맹자》, <양혜왕> 상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과인이 듣기로는, "탕(湯)은 걸(桀)을 몰아내고 천자가 되었고, 무왕(武王)은 주(紂)를 쳐내고 천자가 되었다" 하던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맹자가 답했다.
"전해오는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신하 된 자로서 제 임금을 시해한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한 이는 (왕으로써의 권위를 이미 상실한) 필부일 뿐이니, 저는 무왕이 "주라는 필부를 주(誅)하였다"는 말을 들었지, "임금을 시(弑)하였다"는 말은 들어 본 바 없습니다."


(중략)


봄에는 밭갈이를 살펴보고 부족함을 보충해주고 가을에는 추수를 살피고 부족한 것을 지원해줍니다.
하나라 속담에 ‘우리 왕이 유람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쉬며 우리 왕이 놀러오지 않으면 어떻게 왕의 도움을 받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번 유람하고 한번 행락을 떠나는 것이 제후에게는 법도가 되었습니다.
지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왕의 순행에 군대가 동원되고 그 식량이 징발됩니다. 그래서 굶주린 자가 먹지 못하고 피로한 사람이 쉬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눈을 흘겨보며 사람들끼리 헐뜯습니다. 이것이 백성들을 사악하게 만들게 됩니다. 왕이 천명을 거역하여 백성을 학대하고 음식을 물 흐르듯 낭비하게 됩니다.
방탕하게 놀고 술과 사냥에 빠져 제후가 근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맹자》, <양혜왕> 하



중세 유교에서 왕의 정당성 이야기할 때 늘 인용되는 양혜왕 조.


여기가 그 유명한 "역성혁명" 조임.

왕이 왕다워야 왕이지 아니면 범부와 다를 바 없다.

즉 신분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문구에요.



그래서 이 시대 유학자가 

왕후 - 장상의 피가 따로있냐는 진승/오광의 난에

"네가 하는 말은 옳지만 너는 왕답지 못했으니 실패한 거다"라고 평가한 거죠.








근데 대부분은


양란 끝나고 경신대기근까지 지난 뒤의 성리학을 들고 와서


중세 유교는~ 신분제 고착화~ 이러고 있읍니다....



머리가 안 아프겠습니까?



원래 옛날엔 조선 신분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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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배웠을 거에요

근데 최근은 좀 많이 달라진 게 정설입니다

중인계층은 자신들을 오히려 전문직을 가진 자부심있는 계층이라고 보고

오히려 양반으로 올라가는 걸 가문의 수치라고 한 문서도 발견되었구요(....)

양반은 법적으로 양반은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자의 3대손"까지고,

사회적으로는 주변 사람들과 양반 사회가 인정하는 집안이었어요.

중인 계급에서 양반으로 생원시/진사시 붙어서 올라가서 군수까지 한 집안도 있습니다.

나중에 족보를 갈아끼워서 원래부터 양반가인 척 나왔지만 옛 족보가 발견되고 초기 일기가 나오면서 확인됐어요.


사실 이건 서양 봉건제에 억지로 맞추면서 일어난 문제라 따로 분석할 필요는 있지만서도요.


이게 조선시대가 철저하게 명예만으로 돌아가는 구조라서 그래요

명예를 잃는 게 죽는 거보다 무섭다고 봐서 삼족이 멸족해도 자기가 옳다고 한 걸 우직하게 밀고나가다 죽는 게 그래서 나오는 거죠

내가 죽고 가족이 노비가 돼도 세상은 우리가 진짜 양반이란 걸 알아줄 것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 양반들은 여유금액을 무조건 손님들, 그리고 근처 양인들에게 뿌리는 게 일종의 규칙이었구요.


그래서 세종이 양민 위도 아래도 없다(왕족은 법령에서 언급하지 않음) 하고

벌로 인한 관노비 이외를 없애려다가 사노비를 남기기만 한 거임.


오히려 중세 유교가 아직 크던 15-17세기 초반까지는

양인이 세금 덜 내려고 노비가 되는 촌극까지 벌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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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사리라는 양인이, 사실 나는 "관노비"다 라고 소송을 제기한 거임

다물사리는 윤필이라는 이지도의 사노비와 연애결혼했는데, 그렇게 낳은 6명의 자녀는 일단 원칙적으로는 이지도 소유였음


일단 이지도는 6명치의 세금을 전부 부여하기는 그러니 둘셋 정도만 자기의 솔거노비로 등록하고 말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다물사리가 소송을 제기함

사실 내 어머니는 성균관 관노비였다 그러므로 나는 관노비이고, 우리 자식들은 관노비로 등록되어야 한다고.



자기가 노비라고 소송을 제기한 이 케이스는, 조선시대의 특이한 노비제도 떄문에 일어난 일임


사노비는 일단 노비지만 조선은 법적으로 노비와 양인의 구분을 애매하게 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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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사노비는 말이 노예지

법적으로 양인과 거의 같고, 대신 자기 세금을 양반에게 위탁하고, 자기 수입 일부를 양반에게 바치는 대신 일시적으로 돈을 받을 수 있는 거래의 경우가 많았음.

이런 걸 자매노비(스스로 자, 팔 매)라고 함.


참고로 이런 노비들이 얼마나 법적 지위가 낮지 않았냐의 근거로

이숙번의 노비 성폭행 미수 사건이 있음


이숙번은 태종의 공신 중 하나였는데,

이숙번이 자기 사노비를 덮치려다가 사노비가 휘두른 칼에 맞고 상처를 입자 

이숙번이 노비를 고소한 사건임



근데 이숙번이 패소함. 노비는 무죄가 되었고, 오히려 이숙번과의 채무관계를 해소시켜줌.

왜냐? 이숙번의 사노비는 법적으로 양인 취급받았거든.

또한 양반이 관노비를 성추행했다가 실형을 받은 사례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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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양반이 자기 집 노비가 아프니까 비싼 약을 지어먹이고,

그래도 죽으니 관을 짜서 묘를 만들어주고 제사를 지내줌.



왜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졌냐면, 조선의 양반-노비 관계는 군신관계로 해석했었기 때문이야

내가 군주고 노비는 나의 신하다. 즉 일본의 가신과 더 비슷한 법적 개념을 가지고 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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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6세기에는 노비 인구가 전체의 7할을 넘기 시작하는데,

지방 양반들의 노비로 인한 실질적 사군대 조성 및 세력 강화와

세수 감소를 걱정한 나머지 


사노비와 관노비의 세제 혜택을 폐기해버림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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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가 양반 재산을 들고 튀어서 양반이 경고장을 보내고 소송한 사례가 일어남(....)


17세기에는 진짜 이렇게 노비제도가 기묘하게 되다 못해

우리 노비가 내 땅과 세금을 들고 튀었으니 관은 그놈에게 가서 받아주소 하는 일까지 일어남(....)

사실 이게 진짜 "추노"임

추노는 그러니까, "저 노비가 내 돈을 떼먹었으니 저 놈에게 내 세금을 내게 하소"라고 관에 하는 요청이었고

조선의 관청은 그걸 들어줘서(.....) 거주이전지를 찾아가서 세금 관련 통보를 하고 끝났음.


잡아서 데리고 온다? 그런 거는 매우 예외적으로,

범죄를 저질러서 노비로 떨어진 본인이거나

반역죄급을 저질렀는데 일단 멸족은 면한 그런 경우에나 있었다고 보면 됨.


그러다 보니 이 시대에 오면

노비가 스스로 양인이 됨


연구결과에서는( > Gwyn Campbell의 Structure of Slavery in Indian Ocean Africa and Asia(2004))

단성은 1717년엔 27.6%, 1786년에는 8.8%이고

울산은 1729년엔 13.9%, 1765년엔 2.0%

. 대구는 1732년엔 26.6%, 1789년에는 5.0%

언양의 경우엔 1711년엔 8.2%, 1798년엔 1.4%로 추정함




근데 이게 양란, 대기근으로 완전히 박살남.


노비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머슴이 생김.

신분적으론 양인인데 경제적으로 종속당하는 노예와 같이.


양반의 명예 제도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일부 사대부가 권력의 독점을 노림.

암행어사 박문수가 괜히 실적이 높았던 게 아님.


유교의 폐단, 유교의 고착화를 지적하고 싶으면 이 시대를 꺼내오면 됩니다

진짜로 이 시대는 기존 성리학이 썩었다까지 나오며 고증학이라는 새로운 학파가 나올 정도였고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핫한 주제거든요.







요약



"중세" 유교는 성경원본주의자 같은 원시유교에의 회귀를 노리는 학파였음.

우리가 아는 "신분제 고착", "왕-양반-중인-양민-천민"은 근대 유교, 그것도 후기(18세기 중반 이후)에 와서 변질된 형태임

조선 전기 유교는 정말 이게 이렇게 이론적으로 굴러간다고? 할 정도의 완벽한 유교적 이상 운영을 하는 집단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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